틀
내가 아는 아이는 고리타분한 틀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리곤했다. 이를 테면, 바다같은 파란 불에 타 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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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난 연기를 한다 난 행복하다고 오늘 하루도 너무나 즐겁다고 이렇게 하면 착각 속에 빠져들곤 한다 난 행복한 사람이라고 오늘도 난 연기를 한다
멋진 문장을 보면 항상 담아가기 전에 샘이 났다. 어쩜 그렇게 꼭 맞는 단어와 알맞은 띄어쓰기, 적잘한 문장 부호, 무엇보다도 군더더기 없는 여백. 그 안에 담긴 낯설고도 익숙한 의미. 나는 약이 올라서 화난 듯이 꾹꾹 담아놓고는 유리로 만든 꽃을 만지듯 했던 것이다.
- 그거 알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그러니까 이 우주 말이야, 실은 버려진 곳이야. 사뭇 진지한 표정,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진짜 인간과 진짜 세상은 다른 곳에 있는 거지. 고통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곳은 이를테면, 프로토 타입, 시험버전인 거야. 그는 몇 번인가 기침을 내뱉었다. - 초파리로 실험해본 적 있어? 그거랑 똑같아. 우리는, 인간은 단지 유리병 속에 갇힌 초파리일 뿐이야. 병 속에서 번식하고 생육하는 사명만을 가지고 있는. 다시금 마른 기침. - 나는 가봤어. 핏발 선 눈 뒤로 흐르는 평온감. - 완전무구한 이데아,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 오, 그 완벽한 사랑과 순진한 기쁨. 그곳을 나는 가봤어. 인간은 이해하지 못.......
마음에 연무가 낀 지 오래이다 비가 내리고 천둥이라도 친다면 그 폭풍우, 가라앉기를 기다릴 테지만 너는 내게 와 안개가 되었다 빗방울처럼 닦을 수도 없고 기다리기엔 그침을 알 수 없는 내디딘 한 발마저 절망 끝으로 몰아넣는 너는 내가 겪는 가장 지독한 연무였다.
그대로의 너를 본다 네가 그려내는 성격이나 네가 연주하는 마음이나 네가 말하고자 하는 손짓이나 나를 잡아오는 손가락 사이사이 그 맞물려오는 온도로, 나도 나도 네개 드러나길 수접어 차마 꽉 잡지는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널 좋아한다는 말 말고 그저 생각이 났고 늘 보고싶었다는 그런 말 하기 싫은 말도 많았다. 늦어서 미웠다는 말 말고 늘 기다렸고 늘 기다렸다는 그런 말 어떠한 말이든 어떠한 시간이든 좋다. 그저 함께하고 싶다. 밤하늘이 예쁘다고, 딱 너만큼 예쁘다고.
나는 가끔 내 감정이 디지털이었으면 한다. 감정이 벅차올라 뭐라 정의할 수 없을 때 내 감정이 디지털이라면 0또는 1로 정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잠겨서 말이다.
그릇이 깨진 파편에 손가락이 베이듯 기억이 깨진 파편에 마음이 베인다 아름다운 기억의 파편이 이토록 날카로은 이유는 그만큼 아꼈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너에게 묻는다 제일 좋아하는 너만의 꽃 물도 햇빛도 없이 네가 보고 싶을 때 언제나 살아있는 꽃이라면 서슴지 않고 꺾을 용기가 있는지를 나에게 대답한다 언젠가 나는 그 꽃을 꺾어 물도 햇빛도 존재하지 않는 나만의 네모난 안경 속에 비추어진 언제나 죽어있는 꽃을 살아가게 만들 것이라고 시간이 무한의 꽃을 분쇄하고 공기의 흐름 속 줄기의 자락이 힘없이 내곱아 갈 때 나는 그제야 알게 될까 황량한 대지 홀로 자리를 지키던 너만의 꽃은 투명한 무게에 힘이 잔뜩 실려있었다
너는 오른손잡이라 책상의 오른쪽이 더 지저분했다 접근성이 좋으니 당연한 거라나. 그 주장이 타당한지 아닌지 따져 볼 생각 한 번을 안 했다. 재미있다는 듯 그냥 씩 웃으면 따라 웃는 너를 보는 게 좋았다. 실은, 네가 좋았다.
말이란 것은 때때로, 아니 실은 매번 불완전해 실수를 저지르기 싫은 입은 그만 봉해버리지 몇번이나 아랫입술을 깨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사각사각한 당신의 뉘앙스를 살릴 수가 없어 가는 연필을 들고 조심스레 밑그림을 그려도 그 위를 찬연하게 수놓을 색이 내게는 없어 후덥지근한 저녁의 하늬바람이 내 이마를 식혀도 책상에 쏟아진 잉크병만을 멍하니 바라다볼 뿐 파랗게 물든 마음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해
열 걸음 정도 뒤에서 네 등을 보며 걸었다 이 정도면 같이 맞는 첫눈이란 생각에 손끝은 얼지도 않고 그저 뜨겁기만 했다 뛰어가 너의 손을 잡고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데어 불그스름하지 않은 데가 없는 나를 너에게 보이고 싶었다.
무르다 사랑은 허상이 아닐 수 없지만 때마다 꿈꾸게 되는 영겁의 달력이나 널 가장 쉬이 꾀할 수 있을 불사의 괴물 같은 것들 진시황의 오랜 과제이자 파국에까지의 과육난 한 마리의 이빨 없는 뱀이 되어 탐스러운 혀를 놀리고 싶다 후에 너는 나의 수준이 되어 헐벗은 인간으로 수치를 잊은 살결로 나는 너의 몸짓에 잠겨 비로소 익사할 것이다 허상은 허상만을 허한다 가고 남은 나의 혼은 그 제일의 정서로써 네 언저리에서 숨쉴 것이다 이번 생의 내 몫은 의외로 무르게 되었다
별이 떴다고 항상 가슴 설레일리가 없지 않은가 내 별을 사랑함은 빛나서가 아니라 어두운 밤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한결같이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별을 사랑하는 것이 익숙해졌다해서 별을 사랑하는 것이 시들해진 것이 결코 아니다
네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다 세게 베인 것도 데인 것도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발작 같은 우울에 잠겨 아득한 시야를 감곤 꿈을 먹는다 아, 내 이상이여! 너는 항상 꿈에 나와 내 흉터를 난도질하고 영영 눈을 감게 한다 눈꺼풀 밑의 암흑 속에선 불무리가 내린다 네가 자꾸만 새벽을 삼킨다
작은 새싹이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은 고요히 흘러간다 살겠다는 발버둥 꽃을 피우겠다는 그 의지가 시간과 함께 쌓이고 또 쌓여 그렇게 열매를 맺는 거다 우리라곤 다를까 노력이 쌓이고 시간이 쌓이다 보면 반드시 꽃을 피울 날이 올 것이다 새싹이 그러했듯이
너는 종종 물이 되고 싶다고 너를 껴안을 때 보이는 빈틈이 늘 미안해 라고 말하면서 아주 완벽하게 너를 안아주고 싶다 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무슨 그런 말이 있어 하는 것이 전부였다 속삭이는 말 사이 스며있는 네 감정을 혹시라도 놓칠까 봐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달 밝은 날에 밤길을 걷다 보면 물속을 걷는 느낌이 든다. 가로등의 인공적 빛과는 다른 옅은 빛이 내 주위를 맴돌고 내 발끝은 희미한 자태만을 내보일 때 내가 땅을 딛고 걷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흘러가는 거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특히 그런 날의 밤에는 괜스레 감정이 북받쳐서는 나도 모르게 시를 쓰고, 노래를 흥얼거리다가도 금세 시무룩해져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다. 다음날 생각하면 부끄러울 글들을 무언가에 홀린 듯 마구 써 내려가다가도 이유 없는 무기력함에 그저 정처 없이 떠다니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뜨는데 낮의 햇빛과는 다른 좀 더 부드럽고 뭐랄까, 바람 같은 햇빛이 눈가를 간지럽힐 때.......
너와의 연애는 그랬다 언제나 내가 한 칸 위에 서서 거리를 좁히지 않고 너를 내려다보았다 혹여 네가 올라오려고 하면 난 안간힘을 써가며 계단을 오르기에 바빴다 힘들어하는 너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느덧 계단의 끝에 다다랐고 더 이상 올라갈 곳은 없었다 이제야 한 칸씩 내려가려고 하는데 너는 이미 저만큼 내려가서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너와의 연애는 끝이 났고 난 여전히 계단 한가운데에 홀로 서있다
당신이 자주 넘어지던 가닭은, 당신의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었소. 당신을 짊어진 지구가 너무 둥근 탓이었소. 당신이 자주 눈을 뜨지 못했던 까닭은, 당신의 눈이 쇠해서가 나이었소. 당신을 비추는 달빛이 너무 찬란했던 탓이었소. 당신이 자주 숨이 차오르던 까닭은, 당신의 심장이 지쳐서가 나이었소. 당신의 주위를 메우는 꽃향기가 너무도 짙었던 탓이었소. 아파하지 마소서. 당신이 걸어온 길이 비록 곧지 않을지라도 무사히 도착하였소. 당신이 온 길은 틀린 길이 아니었소. 이제 아파하지 마소서. 당신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나이다. 막혔던 숨, 내쉬소서. 당신이 흔뿌린 꽃향기에 가득 적셔진 우리는, 기억하리다. 당신도 하나의 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