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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예 시대 아이돌에서 레전드 아티스트로 – 프랑스 갈(France Gall, 1947~2018)

프랑스 갈 (출처:wikimedia.org) 유명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랑스 갈의 본명은 이자벨(Isabelle)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로베르 갈(Robert Gall)은 에디트 피아프와 샤를 아즈나부르의 노래를 작곡했었죠. 어머니 세실 베르티에(Cécile Berthier)는 저 유명한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의 공동 설립자인 폴 베르티에(Paul Berthier)의 딸이고요. 잘 알려진 음악가, 예술가들이 친척이었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집에 자주 찾아왔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자벨이 어릴 때부터 피아노나 기타를 연주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죠. 프랑스 갈과 아버지 로베르 갈 (출처:Le Figaro) 어린 이자벨은 아버지를 따라 뮤직홀 올랭피아의 무대 뒤에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음악적 재능을 살리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무대 뒤는 물론이고 유명 가수들의 공연에 이자벨을 자주 데리고 다녔죠. 심지어 학교도 빼먹고 콘서트를 보게 했다고 합니다. 이자벨이 15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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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향해 끝없이 질주한, 클로드 프랑수아(Claude François, 1939-1978)

클로드 프랑수아는 우리나라에 <마이 웨이(My Way)>로 잘 알려진 노래의 원곡 가수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 중 한 명이었죠. 그는 비주얼 샹송의 선구자이자 프랑스에서 디스코를 유행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클로드 프랑수아 (출처:Télé Star) 1939년 이집트의 이스마일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수에즈 운하 회사의 별장 중 하나에서 아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 회사에서 일했거든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폭격을 받는 바람에 별장이 파괴돼 이사하긴 했지만요. 그러다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Nasser)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고 그에 반대해 프랑스와 영국이 개입하면서, 서구의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폭발한 이집트에서 클로드 프랑수아의 가족은 추방됩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로 쫓겨난 거죠. 프랑스로 이주한 클로드와 가족은 몬테카를로를 거쳐 니스에 정착했습니다. 클로드가 17세였을 때죠. 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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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 d’habitude(언제나처럼)- 클로드 프랑수아(Claude François)

늘 그렇듯이 미소 짓고 늘 그렇듯이 웃기까지 하고 늘 그렇듯이, 결국은 살아가겠지 Comme d’habitude je vais sourire Comme d’habitude je vais même rire Comme d’habitude, enfin je vais vivre 클로드 프랑수아가 1967년 발표한 <언제나처럼>은 연인이었던 프랑스 갈과 헤어지고 만든 노래입니다. 사랑이 시들해지고 일상이 반복되면서 외로워한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두 사람이 연애하고 이별한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단순히 시간이 흘러 권태를 느낀 건 아닌 듯합니다. 1964년 올랭피아 공연에서 클로드 프랑수아 (출처:Journal des Femmes) 클로드가 프랑스 갈과 사귀기 시작한 것은 1964년, 그가 25세 때였습니다. 아직 이혼하진 않았지만 아내와 갈라선 상태였던 그는 구름 같은 소녀 팬들을 몰고 다니는 최고의 예예 스타였죠. 막 데뷔한 17세의 프랑스 갈도 클로드의 공연을 빠짐없이 보러 다녔습니다.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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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인 존재감,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1944~2024)

텔레비전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1960년대, 프랑스의 대중음악계는 비주얼 가수가 필요했습니다. 귀엽고 밝은 이미지의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어딘가 불안정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가수가 등장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이 시기 젊은 세대 가수들 중에서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죠. 바로 프랑수아즈 아르디입니다. 1966년의 프랑수아즈 아르디 (출처:Wikimedia Commons) 어린 시절의 프랑수아즈 아르디는 고립되고 외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독신으로 지낸 어머니는 주말마다 외조부모의 집으로 프랑수아즈와 그녀의 여동생을 보냈고 여름 방학이면 독일어를 배우라고 오스트리아로 보냈습니다. 할머니가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성격이라 그녀는 늘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는데요.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외할머니가 자매에게 보도록 허락한 유일한 방송 프로그램 <관객의 시퀀스(La Séquence du spectateur)>. 자매는 할머니의 박대를 견뎌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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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s les garçons et les filles(모든 소년과 소녀들) -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나의 낮과 밤은 똑같기만 해 기쁨은 없고 따분함으로 가득 차 있지. 아무도 내 귓가에 "사랑해"라고 속삭여주지 않아. Mes jours comme mes nuits sont en tous points pareils Sans joies et pleins d'ennuis Personne ne murmure "je t'aime" à mon oreille 레코드사 보그와 계약하고 프랑수아즈 아르디가 처음 낸 앨범에는 4곡이 수록되었습니다. 세 곡은 그녀의 자작곡이었고 하나는 미국 노래를 번안한 곡이었죠. 녹음은 1962년 4월에 이루어졌는데, 그때 아르디는 18살이었습니다.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1962년 음반 (출처:Discogs) 자작한 곡들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수아즈 아르디는 작가⸱작곡가⸱음악출판인 협회인 사셈(SACEM:Société des auteurs, compositeurs et éditeurs de musique)에 가입해야 했는데요. 당시 그녀는 악보를 쓸 줄 몰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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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te dire adieu(어떻게 네게 안녕이라 말할까) -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부싯돌 같은 내 심장은 빨리 불붙고 내열유리 같은 네 심장은 불이 붙지 않지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안녕이란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Mon cœur de silex vite prend feu Ton cœur de pyrex résiste au feu Je suis bien perplexe Je ne veux me résoudre aux adieux <어떻게 네게 안녕이라 말할까>는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아홉 번째 앨범 <어떻게 네게 안녕이라 말할까(Comment te dire adieu)>의 첫 곡이자 표제곡입니다. 1995년 CD로 재발매된 앨범 <어떻게 네게 안녕이라 말할까>. 1968년에 나온 앨범은 제목이 따로 없었지만 이 CD에서 제목이 붙었다. (출처:Discogs) 원곡은 아놀드 골랜드(Arnold Goland)와 잭 골드(Jack Gold)가 작곡하고 미국 가수 마가렛 화이팅(Margaret Whiting)이 부른 <안녕이라 말하는 건 아파요(It Hurts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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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age personnel(개인적 메시지) -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언젠가 날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루도 기다리지 마, 일주일도 기다리지 마 삶이 널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니까 나를 찾으러 와줘 Si tu crois un jour que tu m'aimes N'attends pas un jour, pas une semaine Car tu ne sais pas où la vie t'amène Viens me retrouver 1973년, 임신 중이었던 프랑수아즈 아르디는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어 줄 음반사와 작곡가를 찾았습니다. 작곡가이자 예술 감독으로 더 명성이 높았던 가수 미셸 베르제(Michel Berger)가 만든 베로니크 상송(Véronique Sanson)의 앨범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녀는 사진작가 장-마리 페리에(Jean-Marie Périer)를 통해 베르제와 만납니다. 1972년 발매된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13번째 앨범. 음반사 소노프레스에서 3년 동안 그녀는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다시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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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의 시초? - 1960년대 프랑스 예예 시대

<케데헌>의 열풍이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역대 가장 많이 본 영화로 등극했을 뿐 아니라 빌보드까지 석권했습니다. K팝 아이돌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그런데 이 아이돌의 개념이 대중화되고 지금과 같은 팬덤 문화가 생겨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첫 사례는 아마도 이탈리아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루돌프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 1895~1926)일 겁니다. 루돌프 발렌티노, 영화 <셰이크(The Sheik, 1921)>에서 발렌티노는 화려한 외모와 뛰어난 춤 솜씨로 여성들에게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로 그가 사망했을 때 집단적인 히스테리 현상이 일어났다는데요. 여성 팬들 중 몇 사람이 그의 무덤 근처에서 자살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1915~1998)가 진정한 최초의 아이돌로 꼽힙니다. 프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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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춤추러 가는 최고의 미녀) -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오늘 밤, 춤추러 가는 최고의 미녀가 될 거예요,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여자들을 이기기 위해. Ce soir, je serai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 Pour mieux évincer toutes celles que tu as aimées 실비 바르탕(1944~) 실비 바르탕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배우입니다. 불가리아에서 태어났지만 가족과 함께 어린 시절 프랑스로 이주했죠. 열일곱 살인 1961년에 가수로 데뷔하면서 예예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했습니다. 예예 문화는 현재의 아이돌 문화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녀는 예예의 또 다른 대표적인 아이콘 록 가수 조니 할리데이와 결혼해서 ‘프랑스 연예계의 로열 커플’로서 모든 이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스물한 살, 조니 할리데이는 스물두 살. 이 커플은 프랑스 대중문화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1980년에 이혼하며 둘은 헤어졌지만 이후에도 무대에서 듀엣으로 노래하며 청중에게 감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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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aritza(마리차) -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두 눈을 감으면 들려와요, 아버지가 부르는 이 후렴이 Et pourtant les yeux fermés Moi j'entends mon père chanter Ce refrain 1960년대 프랑스 청춘 문화의 상징이었던 실비 바르탕은 일본 아이돌 문화의 원류를 제공해 해외 대중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가수입니다. 그녀는 1944년 불가리아의 이스크레츠에서 태어났지만 8살이던 해에 부모님, 오빠 에디(Eddie)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집권 하에서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죠. 실비 바르탕과 가족. (출처:sylvissima.com) 대형 음반회사에서 일하던 오빠 에디의 권유로 실비는 1961년 가수로 데뷔합니다. 그녀는 곧 예예의 아이콘이 되었고 현재까지 경력을 이어가는 동안 40개가 넘는 스튜디오 앨범과 수많은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실비의 노래는 1968년에 내놓은 <마리차>일 것입니다. 가수 이미배 씨가 <마리짜 강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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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적인, 너무나 로큰롤적인 - 조니 할리데이(Johnny Hallyday, 1943~2017)

1950년대 미국 문화를 이끌었던 음악 로큰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인 블루스와 재즈에 백인의 컨트리가 혼합되어 탄생한 장르입니다. 틀에 박힌 기성세대의 억압에 저항하는 젊은 세대를 대변해, 로큰롤 뮤지션들은 자유분방한 무대들을 보여 줬지요. 미국의 아티스트들과 영국의 밴드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이들에게 자극을 받아 프랑스에서도 이 새로운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심에 조니 할리데이가 있었습니다. 조니 할리데이. 프랑스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렸다. 그는 ‘예예(Yéyé)’라 불린 그 당시 아이돌스타들 중에서도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스타였습니다. 예예 시대가 금방 저물어 버린 뒤에도 조니는 57년의 경력을 이어가며 가장 유명한 프랑스어권 가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본명은 장-필립 스메트(Jean-Philippe Smet). 생후 8개월 만에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가 모델 일을 재개하면서 그는 고모에게 맡겨져 사촌누나들과 함께 자랍니다. 사촌누나 중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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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Idole des Jeunes(젊은이의 우상)&gt; - 조니 할리데이(Johnny Hallyday)

밤이면 나는 홀로 도시에서 도시로 달려가지 나는 그저 계속 굴러가는 돌멩이일 뿐 Dans la nuit je file tout seul de ville en ville Je ne suis qu'une pierre qui roule toujours <젊은이의 우상>은 조니 할리데이가 1962년 가을 뮤직홀 올랭피아(Olympia) 무대에서 처음 선보였습니다. 이 곡은 미국의 뮤지션인 리키 넬슨(Ricky Nelson)의 노래 <10대의 우상(Teenage Idol)>을 프랑스어로 번안한 것입니다. 조니 할리데이의 히트곡 중 하나로, 노래의 제목이 그에게 영원히 따라붙는 별명이 되었습니다. 1962년 올랭피아 무대에서. (출처:Radio France) 아래 동영상은 1962년 11월 28일에 방송된 <기타와 친구들(Guitare et copains)>의 일부분으로, <젊은이의 우상>을 부르는 조니 할리데이를 볼 수 있습니다. 50세가 되던 해인 1993년, 조니 할리데이는 파크 데 프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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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aisse Les Filles(여자애들은 그냥 둬) - 조니 할리데이(Johnny Hallyday)

그래 여자애들이 널 사랑하게 놔둬 Oui laisse-toi aimer des filles <여자애들은 그냥 둬>는 조니 할리데이가 직접 만들었다고 알려진 첫 노래이자 첫 성공작입니다. 그와 ‘질과 장(Jil et Jan)’이 함께 썼죠. 질과 장은 라디오 쇼에 나온 조니에 열광해 그를 레코드사 보그(Vogue)에 소개해 준 유명한 작사가 듀오로, 예예 시대의 조니를 위해 많은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조니 할리데이의 첫 음반. (출처:Amazon) 이 곡은 1960년 3월에 나온 조니의 첫 음반에 수록되었습니다. 초기 음반 판매량은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프랑스에선 로큰롤이 아직 낯설었고, 음반 판매점들과 방송은 프랑스 로큰롤이 대중적으로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죠. 유럽 1의 <안녕 친구들>을 제외하곤 라디오 방송국들이 조니의 노래를 내보내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4월에 조니가 월간 TV 쇼 <스타들의 학교(L'École des vedettes)>란 방송으로 TV에 데뷔하면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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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Rock'n'roll Attitude(로큰롤 애티튜드)&gt; - 조니 할리데이(Johnny Hallyday)

네가 짊어진 삶에 맞서 싸워 네가 사랑하는 음악을 위해 싸워 Lutte contre la vie que tu mènes Lutte pour la musique que tu aimes 데뷔 때부터 성공을 거듭해 온 조니 할리데이는 1980년대 초반에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대규모 공연으로 인한 재정 문제, 평단의 혹평, 가족과 건강 문제 등이 조니를 지치게 했지요. 1979년 발표한 <내 낯짝(Ma Gueule)>이 성공한 이후 그는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 낯짝>이 처음 발표된 1979년 파비용 드 파리(Pavillon de Paris) 라이브. (출처:Inoubliable Johnny Hallyday) 그때까지 음반사인 필립스와의 계약에서 조니는 매년 일정한 수의 노래와 앨범, 싱글을 의무적으로 내야 했습니다. 1961년부터 죽 이어진 계약이었죠. 필립스의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한 알랭 레비(Alain Lévy)는 이 시대에 뒤떨어진 계약 조항이 아티스트의 경력을 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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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e Chanteur abandonné(버려진 가수)&gt; - 조니 할리데이(Johnny Hallyday)

블루스는 분명 오늘 밤 그를 위해 만들어진 거야 사람들의 사랑에 자신을 내어주었으니까 Sûr que le blues est inventé Pour lui, cette nuit Parce qu'il a su s'abandonner À ceux qui ont voulu l'aimer 조니 할리데이, 1984년 제니스. (출처:Johnny Hallyday Le Web) 미셸 베르제는 1984년 파리 제니스(Zénith)에서 조니 할리데이의 공연을 보며 가수의 관능적인 퍼포먼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공연 후 분장실을 방문한 그는 방금까지 수천 명의 관객으로부터 환호를 받은 가수가 혼자 남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미셸 베르제는 이 이미지를 가슴에 담고 집으로 돌아가 노래를 하나 만들었는데요, 바로 <버려진 가수>였죠. 미셸 베르제와 조니 할리데이 (출처:RTL) 다음 날 베르제는 조니에게 이 곡을 선물했습니다. 그가 조니를 위해 작곡한 첫 번째 곡이었습니다. <버려진 가수>는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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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강이(@yang.kang.i)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팔로워 6명, 팔로잉 0명, 게시물 1개 - 양강이(@yang.kang.i)님의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보기 www.instagr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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