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라는 말을 처음 만났을 때는 비어 있는 자리로 이해했다. 누가 떠나서, 혹은 죽어서, 거기 아무것도 없게 된 자리. 그런데 다윈은 이 말을 한 가지 뜻으로만 쓰지 않는다. 4장을 읽다 보면 같은 단어가 자꾸 얼굴을 바꿔서 나온다. 어떤 데서는 물리적인 공간이다. 기후가 변하고 땅이 침식되고, 대홍수가 한 자리를 쓸어가면 거기 흙이 남는다. 그 남은 땅이 빈자리다. 어떤 데서는 먹이가 바뀌는 일이고, 어떤 데서는 경쟁자가 사라지는 일이다. 처음엔 헷갈렸다. 같은 말을 자꾸 다른 데 갖다 쓰니까, 뭘 잘못 읽고 있나 싶었다. 그러다 누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빈자리란 경쟁이 아직 없는 곳이라고. 그 말을 듣고 흩어져 있던 게 한자리에 모였다.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아무도 다투지 않는 곳. 흙이든 먹이든 햇빛이든, 누가 차지하겠다고 달려들지 않은 틈. 거기는 비어서 자리가 아니라,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아서 자리였다.
자리가 어떻게 열리는지 다윈은 늑대를 예로 든다. 늑대 한 마리를 보자고. 사슴이 있을 때는 발 빠른 늑대가 유리하다. 사슴을 쫓아가야 하니까. 그런데 양이 들어온다. 그러면 그때는 다리가 짧아도 힘이 세야 한다. 양은 이렇게 끄집어내야 하니까. 양이 들어온 순간, 다리 짧은 늑대 앞에 빈자리가 딱 생긴다. 천적이 바뀐 게 아니라 먹이가 바뀐 거다. 발 빠른 늑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다리 짧고 힘센 늑대에게만 자리가 열렸다. 같은 들판인데 누구에게는 자리가 없고 누구에게는 자리가 생긴다. 이 들판이 어디 먼 데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누군가가 다녀온 양봉장 이야기에서 봤다. 민통선 안쪽, 파주의 어느 양봉장이었다. 작은 통 하나에 벌이 십만 마리쯤 산다고 했다. 그 옆에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는데, 양봉하는 사람이 듣고 싶지도 않던 다윈 같은 이야기를 했단다. 몇 년 전까지는 그 자리에 토끼풀이 하나도 없었다고. 키 큰 잡초가 온통 무성해서 농사짓는 사람들 골치를 썩였다고. 그런데 손을 하나도 안 댔는데, 어느새 토끼풀이 하나둘 오더니 한두 해 만에 잡초를 밀어냈다고. 지금은 그 잡초가 하나도 없다고. 토끼풀은 토종이 아니라고 한다. 1907년에 가축 사료로 들여온 게 야생으로 퍼졌고, 철길을 따라 번져서 한때는 철도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양봉장 주인이 도로 토끼풀로 바뀌었다며 안도한 그 풀도, 실은 백 년 전에 바깥에서 들어온 손님이었던 거다. 그 손님은 옆으로 기면서 줄기 마디마다 뿌리를 내려 땅에 자기를 박아둔다. 콩과 식물이라 뿌리에 박테리아를 데리고 살면서 공기 중의 질소를 끌어다 제 둘레의 땅심까지 높인다고 한다. 그렇게 땅을 자기 쪽으로 바꿔놓으니, 옆에 있던 키 큰 잡초는 설 자리를 잃는다. 벌이 오기 전부터 토끼풀은 이미 그 자리에 눌러앉을 채비가 되어 있던 셈이다. 거기에 벌이 더해졌다. 벌이 토끼풀 꽃의 꿀을 좋아한다. 클로버 꿀은 빛이 맑고 향이 세지 않아 양봉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심기도 한다고 했다. 우연히 토끼풀이 날아왔는데, 십만 마리 벌이 나 이건 싫고 저건 좋다 하고 그 꽃에만 달려드니까, 토끼풀은 수정이 잘 되고 다른 풀은 덜 됐다. 자연에 드문드문 있는 벌이 아니라 양봉장의 벌이라, 토끼풀은 씨를 맺고 또 맺었다. 그렇게 한 철 만에 통 둘레가 토끼풀로 덮였다. 그 이야기를 듣다가 누가 말했다. 그러니까 벌이 좋아할 수 있는 자리, 그게 빈자리네. 벌이 좋아하면 토끼풀이 거기 침투할 수 있지만, 벌이 안 좋아하면 그건 빈자리가 아니라 죽음의 자리네. 맞는 말이다 싶다가도 한 가지가 걸렸다. 벌이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로만 갈렸다면, 양봉장도 없는 들에서는 토끼풀이 어떻게 그렇게 번졌겠는가. 벌이 없는 길가에도, 빈 공터에도 토끼풀은 기는 줄기로 마디마다 뿌리를 박으며 퍼진다. 벌은 그 일을 몇 해에서 한 철로 줄여줬을 뿐이다. 토끼풀에게 그 들판이 빈자리였던 건 벌의 입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 뿌리를 박을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토끼풀이 그렇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걸 보고 나니, 그럼 그 자리는 처음에 어떻게 생기나 싶었다. 빈자리가 어떻게 생기는지 다윈은 격리를 두고 길게 쓴다. 이 글은 글공방나루 토요글쓰기 『종의 기원』 세미나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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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 빈자리 - 종의 기원 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