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
요청 처리 중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었다

세미나에서 황지우의 시를 읽고 소리 없이 함께 읽었다. 읽는 목소리가 다음 행으로 넘어갈 때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어떤 문장들은 소리가 되어야 비로소 살아나는데 이 시가 그랬다. 그리고 한 줄에 걸려 기다리는 일이 가슴 아프다는 데, 기다리는 동안 이미 다가가고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행위는 반드시 타인 속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마음속으로 결심하는 것, 혼자 머릿속에서 천 번 다짐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이 말 앞에서 멈칫하는 순간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걱정이 먼저 든다.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하루가 거기서 소진된다.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가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현장에 서야 한다.

타인 앞에 서는 자리는 예측 불가능하다. 어떤 말을 꺼내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고, 시작한 일이 어디서 끝날지 알 수 없다. 지난 주 세미나에서 토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렀던 경우는 드물었다. 아렌트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한다. 만약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렀다면 타인이 없었던 것이라고. 두려움은 틀린 감각이 아니라 타인 앞에 서는 것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몸의 내성이다. 문제는 그 두려움이 거기로 가지 않는 이유가 될 때다.

약속의 힘은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않지만 그 안에 일정한 안정성을 놓아둔다. 아브라함의 광야에서의 약속, 로마법의 핵심인 계약의 불가침성은 결국 같은 자리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곳에서 그래도 여기에 머물겠다고 몸으로 말하는 것. 두려움이 사라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채로 여기에 남는 것. 황지우의 말이 그것을 받아쓴다: 함께 최선을 다해 늙는 일, 함께 통과하는 것. 그 말은 고백이 아니라 결산이다.

세미나에서 뼈아픈 후회도 읽혔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라는 고백. 거기 있었지만 나로 꽉 차 있으면 타인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 폐허는 있었는데 살아남지 못한 자리다. 존중은 업적이 아닌 인격을 향한다는 아렌트의 지적이 되새겨진다. 사람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존중은 감탄과 달리 사람 자체에 대한 중함이다. 용서는 타인 앞에 서는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두려운 그 자리, body가 움직이지 않던 자리로 가야 한다. 기다림의 의미는 타인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다. 네가 와야 내가 된다. 네가 나타나야 내가 무엇을 했는지 드러난다. 네가 여기 있어야 내가 용서받는다. 기다리는 동안은 타인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고, 그 자리에 머문 채로 약속이 시작된다. 현재형으로 여전히 오고 있는 너를 보려면, 내 안에 그 자리가 있어야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물음 속에서 현재의 약속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오고 있다.

# 관계의기술 # 에세이 # 오늘의생각 # 용서란무엇인가 # 우린괜찮았지 # 인간의조건 # 존중의의미 # 철학공부 # 철학적사유 # 타인과나 # 통과하기 # 한나아렌트 # 함께늙어가는일 # 행위와존재 # 약속의힘 # 시읽기 # 관계의철학 # 기다림 # 기다림의미학 # 기록하는삶 # 너를기다리는동안 # 두려움에대하여 # 마음공부 # 문장수집 # 사랑의본질 # 삶을통과하는일 # 성장하는기록 # 성찰 # 세미나기록 # 황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