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을 열고, 스며드는 냉기에 멈춘 손가락을 보다 냉장고 문을 열었던 목적을 잠시 두고 온 것이 떠오른다. 왜 그 문을 열고 거기 서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다 어제 사놓은 바나나 한 다발을 발견하고 슬며시 문을 닫는다. 천천히 식탁으로 걸어가 검은 반점이 하나, 둘씩 늘어가는 바나나 표면을 쳐다 본다.
표면의 변질이 아득히 멀다고 생각했던 내일을 비춘다. 무리에서 하나를 떼어내고 가만히 멈춰서서 조카의 한 마디 손이 움켜쥐던 어제의 바나나 생각에 한참을 웃다가 오늘에 이른다.
조카의 라즈베리 입술에서 흘러 나오던 얕은 노랫소리가 인어공주의 노랫소리인지 나도 모르게 거슬러 어떤 졸업식 한 순간으로 접어든다. 오늘이 어제인 듯 어제가 그 날 이듯 날짜의 무력함이 떠오르고, 내 손에 쥐어진 바나나를 보다가 냉장고 입구에 넣어둔, 시원해진 스킨로션이 떠오른다.
이제 품절된 남성용 스킨의 녹색병을 쳐다보다, 아! 물 올려야지 냄비에 물을 붓는다.
한참을 꿇인 후에야 위장약 한 봉지의...
원문 링크 : 바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