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소를 나오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찍은 사람이 당선되든 떨어지든, 그것이 개인의 삶을 크게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 줄을 서서 신분증을 꺼내는가라는 의문이다. 이 이익의 부재 속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물음은 박구용 교수가 매불쇼에서 정치의 기원을 다룬 대화를 계기로 깊어지며, 읽다 만 책들 속의 답을 찾아보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부딪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폴리스적 동물로서, 모여 옳고 그름을 논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으로 여겨진다. 또한 폴리스에 속하지 않은 존재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적혀 있다. 이 대목에서 정치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공동의 옳음을 찾는 행위임이 드러난다. 이 의문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으로도 이어져, 공적인 폴리스와 사적인 오이코스의 구분이 제시된다. 폴리스의 자유로운 발화는 가정의 노동이 뒷받침될 때 가능했다는 점이 강조된다. 광장의 정치와 가정의 노동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이 다시 제시된다.
서양과 동양의 고전texts를 통해 정치는 위계의 옳음을 묻는 자리에서 이익의 옳음을 묻는 자리로 바뀌었다는 점이 도출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속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해석도 재조명된다. 초기에는 이익의 추구가 결국 전체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주장이었으나, 실제로는 도덕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인다. 그러한 역전은 과거의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흔들고, 현재의 광장에 선 이익의 추구자들 역시 옳음을 묻는 시민으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현대의 정치 현상은 지역 대표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에 이른다. 지역을 대표하는 상원과 같은 자리가 없어, 국회가 한 채로 남아 있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이로써 지역과 개인의 상호작용이 약화되었지만, 자연스럽게 모든 이가 옳음을 묻는 마음은 길러야 생긴다는 결론에 이른다. 강과 자연의 권리 같은 새로운 담론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표를 주지 않는 강을 대신 말하는 자리의 필요성도 함께 언급된다. 물에 젖은 손의 광장 행보가 결국 한 채의 필요성과 강의 표현에 닿아, 이익 없이도 옳음을 묻는 마음을 현실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된다. 결국 이익 없는 옳음에 대한 마음이 길러져, 언젠가 한 채의 건립과 강의 입을 담당할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망으로 글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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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 투표소를 나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