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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은 본질이 아니다 — 『종의 기원』 본능장을 읽으며

 본능은 본질이 아니다 — 『종의 기원』 본능장을 읽으며

저녁을 먹고 나면 아내와 동네를 걷는다. 골목을 한 바퀴 돌다가 다리에 기운이 남으면 뒷산 어귀까지 올라갔다 내려온다. 그 길에서 우리는 자주 개를 만난다. 목줄을 한 개가 주인 앞을 종종거리며 걷거나, 풀숲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골똘히 맡고 있거나, 가끔은 저쪽에서 이쪽을 빤히 쳐다본다. 그럴 때마다 걸음이 느려진다. 귀엽다. 쪼그려 앉아 손이라도 내밀고 싶어진다. 그런데 같은 순간 옆의 아내는 팔을 끌어당기며 길 반대편으로 비켜선다. 무서운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 싶다. 아내가 무서워하는 건 큰 개가 아니다. 사나운 개도 아니다. 작고 얌전한 개, 주인 품에 안겨 졸고 있는 개, 그런 개 앞에서도 똑같이 몸을 움츠린다. 개가 크냐 작냐, 사납냐 얌전하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개라는 것 자체를 무서워한다. 같은 길을 같이 걷고, 같은 개를 같은 거리에서 보는데, 한 사람의 몸은 다가가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의 몸은 물러서려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다르게 작동하고 있는 걸까. 한동안 이게 취향이나 경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어릴 적 개에게 놀란 적이 있다거나, 놓여진 길로 걸어온 시간의 차이일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윈을 읽으면서 그 물음은 조금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좋아하고 무서워하는 그 즉각적인 몸의 반응, 생각이 끼어들기도 전에 다가가거나 물러서게 만드는 그것 — 그걸 본능이라고 부른다면, 본능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어디선가 만들어진 것일까. 이 물음을 들고 다윈의 본능장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를 먼저 봐야 한다. 다윈은 왜 본능을 따로 한 장으로 떼어냈는가. 본능은 그에게 골칫거리였다. 부리의 모양이나 다리의 길이가 조금씩 달라지며 쌓인다는 건 그래도 받아들일 만하다. 그런데 본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새는 둥지를 짓는다. 어미가 죽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린 새도 때가 되면 날아오른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그 새끼는 의붓형제를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린다. 배운 적 없이 그렇게 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생각했다. 저건 타고난 것이다. 저건 변하지 않는다. 본능이야말로 종과 종 사이를 가르는 벽이고, 그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다윈은 이 벽을 향해 본능장을 펼친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자연 선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의 이론은 거기서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윈은 한 문장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길들여진 본능이 오래 이어진 강제적 습관에서 대물림된 것이라 여기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사실이 아니다. 그는 에두르지 않는다. 습관은 그냥 대물림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 본능은 어떻게 변하는가. 우연히 나타난 어떤 성질이 그 개체에게 이득이 되면 살아남고, 이득이 되지 않으면 선택되지 않은 채 묻힌다. 그게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인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본능 또한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을 지닌 개체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만 변한다. 이것이 다윈이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다. 다윈은 이 말을 증명하려고 가축을 데려온다. 우리가 기르는 개에게는 공격성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개를 빼면 그와 비슷한 무리들 — 늑대, 여우, 자칼, 고양이과의 짐승들 — 은 양이나 돼지를 보면 사납게 달려든다. 그게 그들의 몸에 새겨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 함께 사는 개는 따로 떼어낼 것도 없이 양과 돼지를 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기색을 보이면 사람 손에 얻어맞거나 죽는다. 여러 세대가 그렇게 흘렀다. 처음 우연히 나타난 얌전한 성질이, 한편으로는 몸에 배는 방식으로, 한편으로는 사람이 그런 놈만 골라 남기는 방식으로 쌓이고 또 쌓였다. 그렇게 가축의 본능은 새로 얻어지고, 야생의 본능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윈은 이렇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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