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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힘에 대하여 - 인간의 조건9

 시작하는 힘에 대하여 - 인간의 조건9

고립은 권력의 발현 조건을 만든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립을 통해 드러난 것은 힘이 아닌 권력의 구분이다. 아렌트는 힘, 세력, 권력을 구분해 설명한다. 힘은 개인이 가진 자연적 능력이고, 세력은 폭력 수단으로 소수를 다수에 통제하는 관성이다. 반면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지는 잠재적 상태이다. 관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권력은 커지며, 작고 잘 조직된 집단이 거대한 제국을 이끄는 역사적 현상은 이로 설명된다. 권력은 씨앗처럼 존재하며, 겉으로 보이는 형태를 없앤다고 잠재태를 없앨 수 없다. 뿌리를 잘라야 한다.

민중의 억압은 단순한 외형의 제거로 끝나지 않고, 잠재 구조의 제거를 요구한다.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도 다신교의 맥락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타인이 존재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에 대한 열망은 다원성 파괴를 낳아 예측 불가능한 타인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낳는다. 작업은 혼자 할수록 잘 되며, 여럿이 함께하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러나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힘은 나눌수록 줄어들지만, 권력은 나눌수록 불어난다.

전제 정치의 핵심 특징은 고립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전제 군주는 백성으로부터 고립되고, 백성은 서로로부터도 고립된다. 현대의 정책적 사례로 3S 정책이 언급되는데, 개인적 공간에서 소비되는 현상은 쾌락의 전달을 불가능하게 한다. 광장은 거대한 잠재력의 공간으로 작용해 모임과 대화를 촉진하지만, 그 자체가 권력의 실체를 완전히 보장하진 않는다. 용서는 고립을 극복하는 정치적 조건의 문제이며, 보복은 인과를 이어가는 수단이다. 용서는 인과를 끊고 다른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행위의 판단은 동기의 순수성이나 결과의 좋고 나쁨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아렌트에 따르면 행위의 가치는 위대성의 기준으로 판단된다. 행위는 예외를 만들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예측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뱉은 말은 사라지지 않고 타인의 세계에 흡수되어 돌아오기 때문에, 없던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행위는 돌이킬 수 없는 실천이다. 배움은 예외적 사건으로, 읽기의 행위는 예기치 않은 시점에 생각을 새롭게 바꾸는 순간이다. 망고 씨앗처럼 아직은 미미하지만, 씨앗 내부에는 이미 망고가 될 힘이 내재해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지금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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