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절은 실존론적 분석론과 원시적 현존재의 해석에 대한 까다로운 방법론을 다룬다. 하이데거가 경고하는 두 함정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일상성은 원시성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현존재가 고도로 발달하고 세분화된 문화 속에서 움직일 때조차도 일상성은 현존재의 한 존재양태일 뿐이라는 인용이 그 특징이다. 둘째, 풍부한 지식이 곧 본질인식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경고가 강조된다. 모든 것을 융합적으로 비교하고 정형화한다고 해서 진정한 본질인식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진정한 원칙은 질서지음 자체를 통해서는 발견될 수 없고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절은 “더 많이 알수록 더 잘 본다”는 상식에 반대하며, 민속학이 원시인 자료를 모으려면 인간 현존재에 대한 어떤 해석을 먼저 깔아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천천히 읽으며 진보가 아니라 반복의 필요성에 주목하고, 존재론은 실증과학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밟고 선 땅을 되돌아보는 작업임을 확인해야 한다. 자연적 세계개념의 이념을 정리하려면 세계 일반의 명시적 이념이 필요하고, 그 세계가 현존재의 구성요소라면 결국 현존재의 근본구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순환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11절의 관문이다.
제12절은 안에있음의 어원을 중심으로 한 해석이다. 핵심은 ‘안에있음’이 공간적 포함관계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의 하나이자 실존범주의 하나로 이해되며, 안에있음은 눈앞에 있는 것들의 공간적 서로 안에 있음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된다. 또 ‘안에’는 이난(innan-)에서 유래하여 “나는 거주한다”는 의미와 “나는 사랑한다”, “나는 돌봐준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는 점이 명시된다. 이 절은 물이 잔 속에 담긴 상태와 내가 세계 안에 있는 상태를 같은 말로 쓰면 안 된다는 점을 설득적으로 반복한다. 의자는 벽을 건드릴 수조차 없다는 무세계적 성격을 예로 들며, 한쪽이 이미 세계를 열어두고 있어야만 접촉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배려(Sorge)’라는 용어가 도입되는 대목은 일상적 고난이나 우울과 무관한 존재론적 구조를 가리키는 용어임을 분명히 한다. 이 절은 부정적 발언의 우세를 통해 현상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긍정적 신호로 읽히며, 자명한 상식을 해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제13절은 세계 인식의 기초를 해체하려는 시도로서, 주체-객체 도식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인식을 주체와 객체의 연관으로 보는 설정의 공허함을 지적하고, 현존재의 바깥에 있음으로의 대안을 제시한다. 본질적은 현존재의 일차적 존재양식에 따라 언제나 이미 밖에 있으며, 각기 이미 발견된 세계에서 만나는 존재자 곁에 있다라는 관점으로 인식의 문제를 재구성한다. 따라서 인식은 내면에 갇힌 주체가 밖으로 나가 외부 대상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계-안에-있는 현존재의 파생적 양태이며, 망각과 오류마저 이 근원적 안에-있음의 변양태로 설명된다. 이로써 인식은 세계-안에-있음 위에 기초한 양태이고, 따라서 세계-안에-있음 자체가 선행적 해석을 요구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며,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문턱이 된다. 세 절은 자명하다고 여겼던 것을 하나의 길로 묶어, 더 근원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동작으로 연결된다.
원문 링크 : 존재와 시간 읽기 제11~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