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 결론은 먼저 제시된다. 알겠다는 것은 주체가 바깥으로 건너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자세다. 건너갈 다리가 필요 없고, 애초에 강 건너편에 이미 있다. 절의 척추이자 중심은 바로 이 세계 속의 위치다. 집과 나무와 별을 아무리 세밀히 묘사하고 그것들이 실체로 무엇인지 따져 봐도, 정작 세계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사물을 더해도 세계가 되지 않는다는 한 줄이 전체를 지탱한다. 절의 심장은 망치가 된다. 망치가 촉수처럼 바라보일 때가 아니라 망치질이 시작될 때 비로소 망치로 기능한다. 쓰면 쓸수록 더 망치다워진다는 역설은, 잘 쓰이는 도구일수록 자신을 숨긴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13절의 “그저 멍하니 바라봄”이 인식의 출발이 아니라 결함태로 깎아내렸던 말은, 여기서 “바라봄보다 망치질이 먼저”라는 적극적 주장으로 되돌아온다. 짧지만 무서운 문장이다. 망치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니라 못과 나무와 작업대와 만들 물건이 한 그물로 엮여 있고, 그 그물이 먼저 있어야 망치가 망치 노릇을 한다.
가죽은 짐승을, 짐승은 기르는 사람을, 시계는 태양의 위치를 가리킨다. 사물 하나를 당기면 세계 전체가 함께 드러난다. 14절의 “사물을 더해도 세계가 안 된다”는 말은 여기서 거꾸로 “도구 하나에 세계가 통째로 와 있다”로 응답된다. 세 절의 매듭이 이때 묶인다. 주의 깊게 봐야 할 단어들은 세계-안에-있음(In-der-Welt-sein)으로, 세 절을 관통하는 뼈대다. 띄어쓰기에 줄표를 박은 이유가 있다. ‘세계’ 따로 ‘안’ 따로 ‘있음’ 따로가 아니라 쪼갤 수 없는 한 덩어리라는 뜻이다. 이미-곁에-있음(이미-세계-곁에-있음)으로 요약되는 핵심은, 우리가 무언가를 알기 전에 벌써 그 곁에 가 있다는 시간적 선행이다. 결함(결여태)은 13절에서 가장 놓치기 쉬운 대목으로, 그저 바라보는 이론적 인식은 더 근원적인 무엇이 아니라, 배려가 멈춰선 결함태로 그려진다. 멍하니 봄은 덜 함이지 순수하게 함이 아니다. 세계성(Weltlichkeit)은 세계라는 사물이 아니라, 세계가 세계이게 하는 짜임이다. 14절 제목 자체다. 탈세계화(Entweltlichung)는 세계를 자연으로, 눈앞의 것으로 환원할 때 세계가 빠져나가는 현상이다. 14절의 경고가 이 한 단어에 응축된다. 손안에 있음(Zuhandenheit)과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은 15절의 짝패로, 작동 중인 도구의 존재 방식과 멈춰서 바라본 사물의 존재 방식을 대비시킨다. “쓸모”로 번역하면 핵심이 흐려지는 이 매개들은 늘 한 쌍으로 잡아야 한다. 지시(Verweisung)는 무엇을 하기 위한 화살표이며, 도구를 도구이게 하고 세계를 그물로 짜는 실이다. 둘러봄(Umsicht)은 망치질을 이끄는 봄으로, 13절의 “그저 바라봄”과는 다른, 손이 가진 눈이다. 또한 따옴표 친 “세계”와 맨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약속이며, 읽는 이의 발걸음이 가장 자주 걸리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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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읽기 13절~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