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 내리는 비가 상세해진다 악보에 새겨진 음표처럼 그런데 이 집 피아노에는 악보가 없지 문제집이 놓여 있지 빗속에 향을 피워두었는데 불이 꺼지지 않아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불안을 티백처럼 우리는 소녀가 있다 올바른 젓가락질을 구사할 순 없지만 소녀에겐 젓가락 한 벌이 있다 젓가락으로 티백을 찌르면 차가 더 진해진다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백 년째 백발이다 소녀는 이 집을 통치한다 죽은 달팽이들을 빗자루로 쓸면 먼지 뭉치가 덤으로 끌려온다 먼지는 반짝 이미 허물어진 것들만 또다시 허물어지는구나 쓰레받기의 백번째 하품 달팽이 껍데기는 바삭바삭하다 창밖이 느리지 이 집은 더 느리단다 백발 소녀는 지각생을 기다린다 기다리느라 골동품이 되어버린 미래 너무 오래 코가 헐어 있다 바깥에선 이곳을 저세상이라고 부르더군 이곳에선 바깥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껍질이라기엔 바삭함이 부족하다 연습장 첫사랑 문제집 사과나무 올리브나무 몰이해의 형식 빗방울은 창문을 깨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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