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 강씨의 제주 입도는 조선 초기의 정치 격변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고려 말 문신이자 무장으로 명맥을 남긴 강영은 전라감사를 지낸 인물로,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사촌 오빠라는 가문 내 관계가 이후의 운명을 좌우했다. 이방원(훗날 태종)이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고, 강씨 가문은 이방원의 철저한 탄압과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피바람 속에서 강영 역시 관직을 잃고, 1402년경 맏아들 귀존을 육지로 은거시키고 자신은 제주도로 피신한다.
입도 과정에서 강영의 정착지는 현재의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일대였다고 전해진다. 현지의 제주목사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제주 도착 전 무인도에서 관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제주에 정착한 강영은 제주 고씨를 배우자로 삼아 정(禎), 복(福), 만(萬)이라는 세 아들을 얻었고, 이들의 후손은 제주도 전역으로 퍼져 신천 강씨의 거대한 뿌리를 형성했다. 학문과 교화를 중시한 강영은 은거 생활 속에서도 제주 후학들을 모아 충효의 도리와 예의범절, 학문을 가르치며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강영은 1413년에 생을 마감했고, 당시의 멸문지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묘비를 크게 세우지 못하고 암매장하듯 매장되었다가 수백 년간 묘소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함덕리 인근 밭에서 쟁기질하던 농부에 의해 지석이 발견되었고, 제주목사 기건이 남긴 문구가 확인되면서 입도조의 묘역이 성역화되었다. 현재 조천읍 봉소동에 위치한 묘역에서 후손들이 매년 제향을 올리며 가문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원문 링크 : 제주도 정착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