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속초로 내려온 이유는 단지 은퇴의 공허를 메우려는 게 아니었다. 병원을 후배에게 넘기고 흰 가운을 벗은 뒤에도 남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어떻게 채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의 질문은 늘 같았다. 거기서 무얼 하고 지내려고 하느냐다. 대답은 언제나 미뤄졌고, 사실은 자기 삶의 방향조차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봄의 속초는 생각보다 천천히 와서 아침마다 청초호를 걷게 했다. 바람은 차지만 갈대 사이로 길이 드러나고, 머물던 철새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듯 물 위를 부산하게 지나갔다. 그런 모습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호수는 호수의 경계가 아니라 바다의 냄새를 닮아 있었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마음을 붙든 것은 거실이나 침실이 아니라 부엌 창이었다. 창 너머로 멀리 설악의 능선이 빛으로 스며들고, 바다 쪽에서 올라오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빛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 창 앞에 서서 이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물 자리를 스스로 정했고, 부엌 공사를 맡길 곳도 지나치지 않으며 한 곳으로 결정했다.
이사 온 지 몇 달이 흐르자 아침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호수를 걷고 돌아와 부엌 창 앞에 선다. 서울에서 가져온 잔을 물에 적시고 차를 따른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잔은 매일 쓰이고, 손님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대한다. 때때로 동명항으로 차를 들고 나가 파도와 해돋이 정자를 바라보며 자리를 고정해 둔 채 앉아 본다. 파도는 들어오고 나가며 다시 들어온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 보여도, 시간은 이렇게 쓰인다.
병원 시절은 시간을 나누는 데에만 익숙했다. 한 사람을 십 분씩 대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식으로 흘렀다. 이제는 시간을 쓰는 방식이 달라졌다. 파도를 보는 데 한 시간을 쓰고 차가 식는 동안 창밖을 바라보는 데 또 한참을 쓴다. 아깝지 않다. 이때부터 오래 사는 대신, 좋게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봄이 다 가기 전 이 부엌에 누군가를 처음 초대해보려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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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 식은 차에서도 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