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에 초파일입니다 빈자의 등불을 하나씩 밝히고 사람들과 한 몸이 되어 앞 길을 조심스레 걸어갑니다 불빛이 열 걸음 정도를 밝히지만 마음 속은 아직 그믐밤입니다 한 걸음 걸으며 오늘을 생각하고 두 걸음 걸으며 하루를 돌이키고 세 걸음 걸으며 지난 기억들의 잔상을 좇습니다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그냥 따라 갑니다 네 걸음 걸으며 옷깃 인연을 떠올려 보고 다섯 걸음 걸으며 함께 했던 그 시간의 향을 들이 킵니다 여섯 걸음 걸으며 내 자신을 그 날로 잠시 놓아 버립니다 등불이 서로 서로의 불빛을 돋우며 행렬은 분주해져 갑니다 일곱 걸음 걸으며 고개를 저은 채 마음을 다 잡아보고 여덟 걸음 걸으며 다시 잔물결처럼 파문지는 망설임을 바라보다 아홉 걸음에 끝내 욕심을 비우고 내려 놓습니다 그러다가 열걸음을 내딛으며 다시 마음 속에 고이 담고 갑니다 초파일에도 그믐달인양 흐린 내 마음에는 빈자의 등불처럼이나 욕심의 행렬이 끝이 없습니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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