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을 지어가실 때 밀가루, 기름진 음식, 술은 가급적 피해 달라는 안내를 자주 듣는다. 며칠 뒤 진료실에 다급한 표정으로 “야식으로 라면을 한 젓가락, 아니 한 그릇 다 먹어버렸다. 약효가 다 날아간 건가요?”라는 고백이 오기도 한다. 다이어트를 하다 치킨을 먹은 것처럼 큰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다. 이럴 때 가장 먼저 알아둘 사실은, 밀가루 라면 한 그릇으로 한약 약효가 파괴되거나 다 날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흡수의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약효와 관련된 화학 작용이 아니라 위장의 소화 능력에 있다.
밀가루나 기름진 음식이 한약재의 성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장에서 소화가 오래 걸려 가스가 차고 속이 더부룩해지면, 약재의 흡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를 식적(食積)이라고 부른다. 한약의 큰 목적은 소화된 성분이 위장 점막으로 100% 잘 흡수되도록 돕는 데 있는데, 위장이 이미 밀가루 음식을 소화하느라 지쳐 있다면 흡수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밀가루를 피하라는 권고는 약효 파괴가 아니라 흡수를 돕기 위한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포기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금기 음식을 어겼다고 해서 마음까지 망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약을 식탁 위에 며칠씩 방치하는 행위가 더 해로울 수 있다. 라면을 드셨다면 다음 끼니부터 소화가 잘 되는 따뜻한 밥과 반찬 위주로 식사를 되찾고, 원래 정해진 시간에 한약을 챙겨 복용하면 된다. 밀가루 음식을 먹은 직후 속이 더부룩하면 바로 한약을 복용하지 말고 산책 등으로 소화를 조금 돕고 속이 편안해진 뒤 복용하는 것을 권한다. 한약은 건강 회복을 돕는 든든한 지원군이지, 스트레스를 주려는 족쇄가 아니다. 남은 기간 동안 긍정적이고 편안한 마음으로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편한 점이 생기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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