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장에 수십 권이 있어도 아이가 매일 밤 같은 책을 가져오는 현상을 관찰한다. “어제도 읽었잖아”라는 말에도 멈추지 않는 아이를 이해하려고 발달심리학의 시선으로 본다. 이 행동은 적어도 세 가지 발달 기능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인지 도식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피아제의 이론에 따르면 아이는 새로운 경험을 기존 도식에 동화시키거나 도식을 바꾸는 조절을 통해 지식을 쌓아간다. 같은 책을 반복할수록 도식은 더 견고해지고, 그 안에서 점차 더 정교한 이해가 형성된다. 처음엔 흐름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새롭고, 세 번째 읽음쯤에는 어휘와 표현에 집중하며 이야기 구조를 내면화한다. 어른에게는 같은 책이어도 아이의 인지 세계에선 매번 다른 층위가 열린다. 두 번째는 결말을 아는 이야기가 아이에게 안정감을 준다. 세상은 예측 불가한 곳이지만, 이미 결말을 안다는 확실성은 심리적 통제감의 뿌리가 된다. 볼비의 애착 이론에서도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은 아이의 안정 기반 형성의 핵심이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때 아이는 이 세계가 믿을 만하다고 느끼며 작은 안전감을 쌓아간다. 세 번째는 반복이 언어와 서사 구조의 발달로 이어진다. 연구는 반복 독서가 새로운 어휘를 더 잘 습득하게 하고, 이야기의 시작·갈등·해결 같은 구조를 아이 내면에 자리 잡게 한다고 밝힌다. 아이가 다음 장면을 미리 말하거나 대사를 읊는 것은 단순 암기가 아니라 서사를 내 것으로 만들려는 신호다. 부모로서 나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할 때 항상 같은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 매번 “이번엔 왜 울었을까” 같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 주면 아이는 매번 다른 탐색으로 텍스트를 마주한다. 아이가 특정 장면의 대사를 먼저 말하거나 결말을 예고하려 한다면 그 성취를 응원해 주지만, 억지로 다른 책을 권하거나 반대로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아이가 준비되면 자연스럽게 다음 책으로 넘어가도록 존중한다. 반복 독서 자체가 걱정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만 집착이 지나치고 불안 반응이 오래 지속되면 아이의 전반적 상황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책을 또 가져오는 아이는 게으르지 않고 새로운 것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독서에 대한 긍정적 경험을 키우는 최선의 방법이다. 2026년 3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