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농로의 배수로 설치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2023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물차 운전자는 1차 하역으로 수로관 7개를 먼저 내려놓은 뒤, 남은 10개를 약 50m 떨어진 작업 지점으로 옮겨야 했다. 후진 준비를 하는 동안 차량 뒤편에서 작업 중이던 인부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차량에 치여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사망자는 2019년에 이미 상해 및 사망보험에 가입된 상태였다.
쟁점은 하역작업 중 발생했는지, 일반 이동 중 발생했는지에 놓였다. 유족과 보험사 사이에는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벌어졌으며, 면책 조항의 해석이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유족 측은 1차로 짐을 내리는 작업은 끝났고 다음 장소로의 이동 과정에서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이므로 일반 교통사고에 해당한다며 보험금 지급을 주장했다. 반면 보험사 측은 공사 현장이 좁아 이동과 하역이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구조였고, 이동 과정 역시 하역작업의 연속된 일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 법원은 보험사 승소로 면책을 인정했다. 현장의 고유한 위험성과 좁은 공간에서의 이동·하역 반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후진 과정도 하역작업의 일부로 해석했다는 이유였다. 이에 유족은 항소했고, 2심인 서울서부지법 제2-1민사부는 이를 번복했다. 항소심은 유족 전원 승소를 선고하며 보험사에 사망 및 부상 보험금 전액과 지연된 이자를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항소심 재판부의 결정적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에 따른 계약자 우호 해석으로, 약관의 면책 조항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해 가입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해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삼았다. 둘째, 현장 특유의 위험이 아닌 일반 교통 위험으로 판단했다. 사고 당시 작업자들은 이미 1차 하역을 완료한 상태였고, 50m를 이동하는 과정은 하역작업에 필수적이거나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위험이라기보다 차량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일반적인 교통사고 위험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번 판결은 거대 보험사가 약관을 무기로 보험금 지급 회피를 시도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