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스미스의 논의에 따를 때 현재 우리는 단순히 ‘감정적’이고 ‘공감적’이며, 우리 마음속에는 ‘중립적 관찰자’가 없다. 그리고 이 ‘중립적 관찰자’를 결여했을 때 ‘감정’은 다만 서로 ‘공감’해 더 거대한 ‘감정’이 될 뿐이다. - pp. 15 그러면서 다시금 묻고 싶은 것은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 불쾌하다는 것의 의미다.
우리는 내면에 자신의 불쾌함을 관찰하는 중립적 제3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감정’의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즉 타인의 ‘감정’을 모두가 함께 비웃는 감정의 소비가 한편에서 비대화되고 있다. - pp. 46 ‘감정’의 표출에는 논거나 묘사 따위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서플리먼트화, 즉 ‘눈물 난다’, ‘무섭다’, ‘감동적이다’, ‘참고가 된다’는 식의 ‘즉효성’을 마치 기능성 식품마냥 요구받는 것과도 병렬적 관계가 아닐까 싶다.
즉 소설의 ‘감정화’인 셈이다. - pp. 78 이와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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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 『감정화하는 사회』 , 오쓰카 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