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가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시대에도 유행을 넘어 하나의 이정표로 남는 유산이 있다면, 펜디 FW26 컬렉션은 그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과거의 찬란했던 아카이브를 지금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서사를 중심으로 한 컬렉션들이 화제를 모으는 가운데, 제시카 알바와 모니카 벨루치의 복귀를 넘어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의 홈그라운드 복귀가 큰 주목을 받는다. 로마 아틀리에로의 귀환은 브랜드의 DNA를 깊이 이해한 협업의 정수를 보여 주고, 정제된 라인과 미니멀리즘으로 다듬어진 새로운 얼굴 거장의 복귀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간결히 재정의한다. 로고 역시 하단 문구를 덜어내고 고딕체의 정갈한 라인으로 바뀌었으며, 레오나르도 소놀리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새로운 시그니처는 라틴 알파벳과 고대 로마 글자의 쐐기형 구두점에서 영감을 받았다.
Less I, More US라는 연대의 메시지는 컬렉션 전반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아틀리에 장인들과 하우스 구성원의 창의성을 함께 예찬하는 방향으로, 남성복의 정교한 재단이 여성의 몸에 유연하게 번역되고 지적 무드를 자아내는 실루엣과 소재의 공유가 돋보인다. 특히 탈착 가능한 코튼 칼라 디테일은 과거 남성 전유물이었던 셔츠 칼라를 여성적 워드로브에 옮겨 담은 오마주로, 여성들의 연대라는 메시지가 작은 디테일 하나에 응축되어 드러난다.
런웨이에서 제안되는 리얼웨이 아이디어도 눈에 띈다. 오버사이즈 테일러링과 화이트 칼라 액세서리의 매치, 시어 소재와 가죽 재킷의 밸런스, 슬림한 스니커즈의 매치를 통해 포멀함과 캐주얼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니룩이 가능하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의 복귀로 소환된 90년대 담백한 미니멀리즘은 와이드 슬랙스와 날렵한 스니커즈의 조합에서 특히 빛난다. 또한 90년대 초창기부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펜디 바게트백의 귀환은 오리지널 코드 번호 26424를 그대로 부여받아 클래식의 정수를 보여 준다. 이 가방은 창조자의 손에서 재탄생한 핵심 아이템으로, 시대를 초월한 타임리스 아이콘의 진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유행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대신, 역사적 서사를 옷으로 번역해 내는 이번 컬렉션은 감상하는 예술에 가까운 완성도로 다가온다. 거장이 설계한 펜디의 새로운 100년에 초점을 맞추며, 다가오는 시즌의 바게트백 에디션에 대한 더 자세하고 감각적인 디테일이 다음 포스팅에서 밀도 있게 다뤄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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